[알베르토의 칼럼] 인테르 110년 역사상 획기적인 인물들
지난 3월 9일, ‘풋볼 클럽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약칭 ‘인테르’는 1908년 같은 날 저녁 밀라노의 ‘오롤로지오(Orologio:시계)’라는 레스토랑에서 창단된 지 110년이 된 것을 자축했다. 당시 ‘밀란 풋볼 앤 크리켓 클럽(현 AC밀란)’ 팀에 속해 있던 44명의 임원들은 외국인 선수를 더 기용하지 않기로 한 팀의 결정에 반발하여 팀을 떠나 ‘풋볼 클럽 인테르나치오날레’라 불리우는 다른 팀을 창단하기로 결정했다.
창단일 저녁, 당시 화가이자 창단임원 중 한 명이었던 조르조 무지아니는 팀 색깔로 검은색과 푸른색을 결정하였다. 푸른색은 밀란팬의 상징이던 붉은 색에 반대되는 의미로 골랐는데, 당시 사용되던 연필이 붉은 색과 푸른 색 두 종류였기 때문에 이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팀 창단 서문에서 무지아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가들이 모여있는 이 ‘오롤로지오’ 레스토랑에서 위대한 재능들이 모인 팀이 창단될 것이며 이 팀은 영원할 것입니다. 이 환상적인 밤에 우리의 팀 엠블럼에 나는 이런 색깔을 부여하려고 합니다. 바로 금색 별이 바탕에 그려진 검은색과 푸른색입니다. 이 팀은 ‘인테르나치오날레’라고 부를 생각인데 그것은 전세계가 우리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인테르나치오날레’라는 이름은 스쿼드의 인터내셔널한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고른 이름이었다. 이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에 개방되어 있었단 사실뿐 아니라 팀 역사 전체를 보더라도 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있어서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정체성을 잘 지켜오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이 다문화적인 성격이 인테르의 팀 역사에 있어 어떤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는가를 이해하려면 최근 9번의 월드컵 결승에 적어도 꼭 한 명의 인테르 소속 선수들이 출전했다는 기록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982년엔 알토벨리, 베르고미, 오리알리, 1986년엔 루메니게, 1990년엔 브레메, 마테우스, 클린스만, 1994년엔 베르티, 1998년엔 호나우두와 조르카에프, 2002년 호나우두, 2006년엔 마테라치 2010년에 스네이데르, 그리고 2014년에 팔라시오가 출전했다.
그리고 오래전 1908년부터 현재까지 8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인테르의 유니폼을 입었고 100명 이상의 감독들이 벤치를 거쳐갔으다. 도합 18번의 스쿠데토와 7번의 코파 이탈리아, 5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3번의 챔피언스 컵, 3번의 UEFA 컵, 2번의 인터콘티넨탈 컵과 1번의 클럽월드컵을 전리품으로 거둬들였다.
이 자리에서 모든 감독들과 선수들, 기록과 110년 역사 동안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든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테르의 역사를 바꿔썼던 순간의 인물들, 지난 금요일로 110년을 지내는 동안 오랫동안 기억되는 인물들, 인테르 팬들의 가슴과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인물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934년 월드컵 시상식 중인 주세페 메아차]
주세페 메아차 Giuseppe Meazza
병약하다는 이유로 밀란에서 쫓겨난 16세의 주세페 메아차를 받아들인 것은 인테르였다. 그는 여기서 14시즌을 보내며 288골로 네라주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득점자가 되었으며 3번의 스쿠데토와 1번의 코파 이탈리아를 팀에 안겼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도 1934년과 38년 두 번의 월드컵을 제패하는 선수가 되었다.
그는 엄청난 테크닉과 천재적으로 타고난 슈팅을 바탕으로 재빠른 움직임과 드리블 능력을 지녀 상대방 수비수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선수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러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이탈리아 축구사 올타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고 있다.
이탈리아에게 두 번의 월드컵 우승을 안겼던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쪼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팀에 메아차가 있다는 건 이미 1-0으로 앞선 채로 경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라고.
메아차는 그렇게 강력했던 선수였고 인테르에 있어서 중요한 선수였기에 그의 팬들은 메아차가 1979년 8월 세상을 떠나자 그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밀라노의 스타디움을 그에게 헌정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현재 전세계에 밀라노의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오’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안젤로와 마시모 모라티 Angelo e Massimo Moratti
부유한 석유기업 오너였던 안젤로 모라티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고작’ 13년을, 그 아들인 마시모가 1995년부터 2004년, 2006년부터 2013년까지 역시 ‘고작’ 두 번 16년을 맡았임에도 이상하게 이탈리아 축구팬들은 마치 모라티 가문이 줄곧 네라주리의 클럽을 운영해 온 것처럼 여긴다.
사실 인테르의 역사상 21명의 클럽 회장이 있었지만 모든 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인테르 팬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안젤로 모라티와 아들 마시모였다. 이들은 인테르에 많은 자금을 항상 투자해왔으며 클럽을 서포트해 왔기에, 역대 구단주들에 비해서 월등히 많은 트로피들을 따낼 수 있었다.
안젤로 모라티는 밀라노 초원의 어느 아주 작은 시골에서 편모 슬하의 유복자로 태어나 14세 때부터 이미 윤활유를 비롯한 유류제품을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놀라운 영업 능력 덕분에 안젤로는 조금씩 힘들었던 유년시절에서 벗어나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석유회사들 중 하나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회사를 통해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축구와 인테르에 대한 안젤로의 엄청난 사랑은 50대 중반에 다다른 그가 팀을 인수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모든 부와 열성을 쏟아부어 1964년과 65년 두 번의 챔피언스 컵 트로피를 포함해 모두 7개의 우승 트로피를 네라주리 팬들에게 안겨주었다.
90년대에 들어 그의 아들 마시모가 팀을 이어받아 인테르에 수많은 캄피오네들을 데려오는데 무려 7억 3천 5백만 유로를 들이부었다. 하지만 그 중 대부분이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고 마시모의 첫 번째 재임기간 동안에 팀은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2006년 그가 귀환하면서는 조금씩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기 시작해서 스쿠데토 5연패, 2010년의 트레블까지 달성하기에 이른다.
비록 쑤닝 그룹이 들어오면서 모라티 가문이 인테르의 경영과 투자자의 위치에서 완전히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축구와 인테르에 대한 열정의 상징으로 이탈리아 축구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가문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엘레니오 에레라 Helenio Herrera
1960년 안젤로 모라티 회장은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를 인테르로 데려오기 위해 설득 중이었다. 원래 스페인계 아르헨티나인이던 엘레니오 에레라는 이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두 번, 바르셀로나에서 두 번의 스페인 리그를 제패한 경험이 있는 현대적인 선수 조련 방식을 가진 혁신적인 감독이었지만 당시에 그를 이해해 주는 이가 드물었다. 1일 2회의 강력한 훈련 시스템, 선수들에 맞춘 엄격한 식단, 경기 전 3일간의 훈련을 고수했고 선수들의 방과 탈의실 벽에 모티베이션이 되는 구절들을 써 붙여놓기도 한 감독이었다.
인테르로 자리를 옮긴 후 첫 2년간 에레라는 단 하나의 대회도 우승하지 못했지만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1962-63년 마침내 모라티 가문에게 첫번째 스쿠데토를 안겨주었으며 이어서 지금도 ‘그란데 인테르’라고 기억되는 무패불멸의 팀을 이끌고 이탈리아와 세계 무대에서 연승을 거두며 강력한 왕조를 구축했다.
바르셀로나 시절부터 에레라 감독과 훈련했던 스페인 출신 미드필더 루이스 수아레즈, 이탈리아 축구가 낳은 희대의 천재 산드로 마촐라, 아르만도 피키, 타르치시오 부르니치, 지아친토 파케티로 이뤄진 거대한 암벽같은 수비진, 브라질 출신의 윙어였던 자이르같은 선수들을 거느리고 엘레니오 에레라는 세 번의 스쿠데토와 1번의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다.
1964년 당시 디 스테파노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 이듬해 에우제비오가 이끌던 벤피카를 연달아 격파하며 챔피언스 컵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게다가 인터컨티넨탈 컵마저 2연패를 하면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팀을 세계 최강의 팀으로 확실하게 군림하도록 지도한 감독이다.
일명 ‘마법사’라 불리웠던 엘레니오 에레라는 축구계에 있어서 심리적 모티베이션, 현대적인 훈련 방식을 고안해 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난공불락의 수비, 역습시에 거칠게 몰아치는 공격 방식을 구사하는 팀을 만들어 ‘카테나치오’라 불리우는 전술을 가장 잘 활용한 마에스트로이다.
에레라 감독이 이끌던 인테르야말로 챔피언스 컵을 우승한 첫번째 이탈리아 팀이 되었으며 동 시즌에 스쿠데토, 챔피언스 컵, 인터콘티넨탈 컵을 동시에 우승한 유럽 최초의 팀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지금도 마법사 에레라가 이끌던 ‘그란데 인테르’는 네라주리 역사에 있어 가장 강력했던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지아친토 파케티 Giacinto Facchetti
18세의 나이에 아주 조그만 지역 축구팀에서 인테르로 이적해 온 지아친토 파케티는 평생을 네라주리에서만 보냈다. 선수로서 18시즌을 뛰며 634경기를 출장하였고, ‘그란데 인테르’의 든든한 기둥이었으며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인테르의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4년부터 세상을 떠난 2006년 11월까지는 클럽의 회장까지 수행했다.
이탈리아 축구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선수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지아친토 파케티는 풀백의 역할을 혁신적으로 수행해 현대축구의 모든 위대한 풀백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수였다. 파케티 이전에 양쪽 측면 풀백의 역할이 단지 수비 부분에 국한돼 있었다면, 파케티의 천재적 역량을 알아본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파케티에게 측면 위아래로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공격수들에게 계속해서 크로스를 올려주고, 가끔은 파케티 본인도 슈팅에 가담할 것을 요구함으로서 그를 공격과 수비 양면에서 모두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케티는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75골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수비수로서는 믿을 수 없는 기록이었다.
파케티의 등번호 3번 셔츠는 2006년 이후 영구결번 처리되면서 그가 인테르에서 뛰었던 그 어떤 선수들보다 상징적인 선수였음을 보여주었다. 단지 위대했던 캄피오네일 뿐만 아니라, 선수와 보드진으로서 두 모습 모두 인테르의 환경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늘 언제나 배우고 따라야 할 리더란 의미에 있어서도 가장 위대하고 적절한 모범임을 드러내보였다.
두 번의 발롱도흐: 로타어 마테우스와 호나우두
I due Palloni d’Oro: Lothar Matth?us e Ronaldo
로타어 마테우스와 호나우두는 인테르 팬들과 클럽 역사에 인테르의 저지를 입었던 뛰어난 선수였을 뿐 아니라 인테르에서 뛰는 동안 발롱도흐를 수상했던 유일한 두 명이라는 이유로도 영원히 기억되는 선수들이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4년간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던 마테우스는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무릎 부상이 있다고 판단했던 독일 메디컬팀의 진단으로 인해 고작 28세에 인테르로 팔려가게 되었다. 인테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오판이었다. 마테우스는 이탈리아 이적 첫 해에 스쿠데토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를 차지하며 인테르, 독일 대표팀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당시 세계 최고로 뛰어난 미드필더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1990년 월드컵을 우승한 독일 대표팀엔 세 명의 인테르 선수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위르겐 클린스만이 그들이었다. 그 해 그는 발롱도흐의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며 브레메가 3위를 차지했다. 네라주리의 팬들에게 마테우스는 정말 어마어마한 선물이나 다름없었고 이듬해 그는 ‘세 명의 독일 선수’들이 포함된 인테르를 진두지휘하며 UEFA 컵을 우승했다.
비록 마테우스가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을 입고 302경기를 뛰었으며 인테르 소속으로는 고작 115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도 모든 팬들이 4년간 네라주리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마테우스를 세계 최고로 강력했던 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반면 호나우두는 1997년 6월 20일에 인테르의 선수가 되었다. 이 ‘전설’은 1997년 4월 13일, 당시 바르셀로나 소속이던 젊은 공격수 호나우두가 비센테 칼데론에서 치러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것을 본 마시모 모라티 회장이 정말 열렬하게 그의 팬이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마시모 모라티 회장은 당시 호나우두를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계약서 상에 필요했던 2천 5백만 유로에 5년간 그의 연봉으로 3백만 유로를 과감히 쓰기로 한다.
그 ‘페노메노(현상, 놀라운 것을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명사: 여기서는 호나우두를 가리킴)’ 가 인테르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도 그가 세계 최고의,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공격수였던 시절로 호나우두 본인의 최전성기였고 그가 달리면서 주력에 가속을 붙이면 최고 시속 36km 의 속도로 뛰던 시절이었다. 밀라노에서는 그를 적극 지지하고 반길 준비가 끝난 클럽 인테르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이지리아 출신 수비수 타리보 웨스트, 인테르의 두 정신적 기둥인 주세페 베르고미와 하비에르 사네티, 아르헨티나 출신의 디에고 시메오네, 우루과이 출신의 젊은 재능이던 알바로 레코바, 프랑스-아르메니아 혼혈이던 유리 조르카에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날개이던 프란체스코 모리에로, 칠레 출신의 이반 사모라노 같은 이들이었다.
팀에 합류하자마자 호나우두는 이렇게 말했다. “곧바로 제일먼저 스쿠데토부터 노릴 것이다.” 라고. 하지만 인테르 팬들은 그의 이적 첫 해에 단지 코파 이탈리아만을 우승하고 자축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고 이어 5년간 인테르는 불행히도 스쿠데토와는 연을 맺지 못했다.
수많은 부상으로 인해 인테르에서 뛰는 5시즌동안 호나우두는 겨우 99경기를 소화하는데 그쳤지만 어쨌든 59골이나 터트렸다. 호나우두가 밀라노에 돌아올 때마다, 그가 커리어 말기에 밀란에서 두 시즌을 보냈던 것과 5년 계약 막판 세 시즌은 거의 필드에 나오지도 못하는데도 꼬박 주급을 수령했으면서 팀을 버리고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간 사실에 대해 항의를 하는 인테르 팬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호나우두는 언제나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사랑했던 팀은 인테르와 레알이었다고 늘 말해왔다. 마찬가지로 인테르 팬들의 대부분은 호나우두가 인테르의 유니폼을 입었던 이들 중에 가장 스펙터클하고 강력한 선수였으며 비록 인테르에서 많은 대회를 우승해 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백만의 팬들에게 위대한 축구와 꿈 그리고 감동을 선물했던 이는 바로 호나우두였다고 말한다.
호세 무리뉴 Jose Mourinho
스쿠데토와 연을 맺지 못한 지 17년이 지나고, 지난 2006-2007 시즌과 그 이듬해 로베르토 만치니가 이끄는 인테르는 데얀 스탄코비치, 루이스 피구,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아드리아누, 파트리크 비에이라, 에르난 크레스포, 에스테반 캄비아소 외 여러 선수들과 함께 2년 연속으로 스쿠데토를 따내며 이탈리아 리그의 챔피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2008년, 구단주 마시모 모라티는 40년 넘는 시간동안 네라주리의 클럽하우스에 부족했던 트로피인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가져다 놓기 위해 시장에 나온 무리뉴 감독을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무리뉴는 80년대 팀의 전설이자, 유명한 프랑코 바레시의 형인 주세페 바레시를 부감독으로 임명하고는 언제나 자신을 보좌해왔던 체력 전담 코치들을 데려왔다. 후이 파리아와 안드레 비야스-보아스가 그들이다.
첫 해부터 곧바로 스쿠데토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를 따 냈고 이어 이듬해, 이탈리아의 그 어떤 팀도 해내지 못했던 ‘트레블’, 즉 스쿠데토, 코파 이탈리아, 그리고 챔피언스리그를 같은 해에 제패하는 업적을 달성하고야 만다.
비록 인테르에서는 겨우 두 시즌에 그치고 말았지만 무리뉴는 기나긴 인테르 클럽 역사에 가장 멋지고 훌륭한 영광의 순간을 선물했다. 이로 인해 ‘스페셜 원’, 그와 함께 했던 그 환상적인 팀 멤버인 베이즐리 스네이데르, 사무엘 에투, 루시우, 캄비아소, 하비에르 사네티, 데얀 스탄코비치, 마르코 마테라치 등은 이탈리아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고, 유럽 전체를 통틀어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조차 이뤄보지 못한 트레블을 달성한 몇 안되는 클럽과 영웅들로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하비에르 사네티 Javier Zanetti
하비에르 사네티가 클럽 인테르의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부분, 그의 팬들에게 지니는 위상에 대해 설명하자면 말이 필요없다. 기나긴 인테르의 역사 속에서 영구결번된 번호가 지아친토 파케티의 3번, 하비에르 사네티의 4번 단 두 개 뿐이라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다.
인테르 팬들에게 사네티는 한마디로 진정한 ‘캡틴’이다. 팔에 주장 완장을 두르고 경기를 뛴 지 13년으로 유일무이한 팀의 상징인 셈이다. 네라주리에서의 커리어 20년간을 통틀어 딱 두 번 퇴장당했다는 사실은 또한 그를 성실함과 매너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네티는 말 그대로 인생을 인테르에 바친 선수다. 19시즌을 인테르에서 뛰면서 858경기를 소화했고 인테르 역사상 사장 많은 경기를 출전했거니와, 밀란 더비를 가장 많이 뛰어본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스쿠데토 5번, 코파 이탈리아 4번,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4번, UEFA컵 1번, 챔피언스 리그와 FIFA 클럽 월드컵 1회등 가장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본 선수라는 기록도 있다.
2014년, 40세와 281일째에 은퇴를 하자마자 사네티는 바로 클럽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네라주리의 보드진에 그가 가세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팀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쑤닝 그룹이 인테르팀의 진정한 정체성과 영혼을 이해하고, 곧바로 팬들에게 승리와 만족이라는 새 시대를 열어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한 멋진 성공들을 곧 되찾기를 바라고 인테르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지금까지의 110년 외에 앞으로 이어질 110년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