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 챔스의 승리요소: 선수의 능력, 감독의 전략, 팀의 경험
[한준의 티키타카] 토트넘홋스퍼와 유벤투스의 2017-18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가장 돋보였던 선수는 손흥민이다. 손흥민을 주목하기 위해 팔이 안으로 굽을 필요가 없었다. 유럽 현지 전문가들이 먼저 인정했다. 초심자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손흥민의 질주와 슈팅은 위협적이었다.
경기 하루 전까지도 선발 출전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웠던 손흥민은, 주어진 선발 출전 기회에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기어코 선제골까지 넣었다. 오른발로 시도하려던 슈팅이 디딤발인 왼발에 맞고도 골문 구석으로 향한 행운이 따랐지만, 그는 그런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감독의 전술, 전략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이 이뤄진다. 선수를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선수의 역량을 어떻게 최대화하고, 상대 선수의 장점을 어떻게 제어하는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의 기량 그 자체다.
■ 전반전 주도한 토트넘, 손흥민의 개인 능력이 만든 차이
손흥민은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유벤투스 감독의 선발 전략을 무력하게 만든 변수였다. 유벤투스는 곤살로 이과인과 파울로 디발라, 더글라스 코스타 등 팀 내 가장 컨디션이 좋은 공격 자원 세 명을 동시에 쓰기 위해 비대칭 4-4-2 포메이션을 준비했다.
세 명의 공격수를 쓰면서 스리톱으로 배치하지 않은 것은 수비 균형과 중원 밀도를 위해서다.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중앙 미드필더 블레즈 마튀디를 배치해 무사 뎀벨레와 에릭 다이어, 델레 알리와 크리스티안 에릭센까지 중원 플레이가 가능한 토트넘의 비대칭 4-3-3 포메이션에 대응했다.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토트넘 감독이 에릭 라멜라 대신 손흥민을 쓴 것이 주효했다. 만약 중앙 지향적인 라멜라를 선발로 썼다면 오른쪽 날개로 뛴 더글라스 코스타가 측면을 더 자유롭게 누볐을 것이다. 손흥민의 측면 돌파를 막느라 유벤투스 라이트백 안드레아 바르찰리가 밀려 내려오면서 코스타는 고립됐고, 벤 데이비스는 한결 수월하게 수비할 수 있었다.
오른쪽 측면 공격에 힘을 줬는데 이 쪽이 막히면서, 좌우 측면 공격 모두 잠잠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과인과 디발라의 투톱도 외로운 경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전반전을 토트넘이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손흥민의 개인 능력 덕분이다.
바르찰리도 키엘리니도 손흥민을 두고 막기 버거운, 환상적인 선수라고 했다. 립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은 90분 경기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르찰리는 손흥민을 막기 위해 거칠어 질 수 밖에 없었고, 조르조 키엘리니는 여러 번 몸을 던져야 했다.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대표 팀 주장 기성용은 “감독의 능력은 양 팀 모두 퀄리티 있는 선수를 갖추고 있을 때 발휘된다”고 했다. 선수가 전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의 기본기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하면, 감독이 아무리 좋은 철학과 전술, 전략을 준비해도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선수가 일대일에서 밀리면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 된다. 이대일, 삼대일 상황을 만드는 조직 플레이를 다듬어야 하는데, 개인 능력으로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선수를 90분 내내 철저히 무력화시키기는 어렵다.
좋은 팀, 좋은 선수가 스스로 실수 하거나, 컨디션 난조를 보여야 ‘이변’이 연출된다. 혹은 수비 전술을 준비한 팀도 퀄리티 있는 선수를 갖춰야 ‘전술 싸움’으로 포장될 수 있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앙투안 그리즈만이나 디에고 코스타 같은 선수를 보유하고도 바르셀로나에 패한 뒤 "메시가 우리 팀 선수였다면 우리가 이겼을 것"이라고 한 말은 투정이 아니다.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도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후보를 묻자 "메시가 지금 어느 팀에 있나?"라고 물은 뒤 '바르셀로나'라는 답이 돌아오자 "그런 바르셀로나가 우승 후보"라고 했다.
차범근 전 감독은 바이엘04레버쿠젠에서의 마지막 시즌에 네덜란드 토털 풋볼의 완성을 이끈 인사 중 한 명인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도를 받은 바 있다. 차 전 감독이 지도자의 길에 들어설 때 미헬스 감독으로부터 받은 조언은 “좋은 선수가 있는 팀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지도자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선수 능력에서 밀리면, 타이틀을 차지할 수 없다. 타이틀이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발전도 멈춘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세계 최고의 전술가로 꼽히지만, 그 역시 모든 경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토트넘이 유벤투스에 패한 날 맨체스터시티도 안방에서 바젤에 졌다. 맨체스터시티는 조별리그 최종전에서도 샤흐타르에 패한 바 있다. 결과에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기 때문에 로테이션을 가동한 결과다. 감독의 영향력이 선수의 능력과 컨디션을 뛰어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다.
전반전에 수비적인 라이트백 바르찰리, 중앙 지향적 왼쪽 미드필더 마튀디를 배치한 유벤투스, 오른쪽. UEFA 공식 기록지
■ 후반전 뒤집은 알레그리 감독의 전술 변화, 감독의 영향력
선수만 좋다고 이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좋은 선수의 능력과 좋은 감독의 전력이 맞아떨어졌을 때 승리할 수 있다. 전반전을 지배한 것이 선수 손흥민의 능력이었다면, 후반전은 알레그리 감독의 전술 변화가 판을 뒤집었다.
알레그리 감독은 전반전에 통하지 않았던 비대칭 4-4-2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면서 문제를 개선했다. 후반 15분 마튀디를 빼고 아사모아, 베나티아를 빼고 리히슈타이너를 투입해 좌우 측면의 공격력을 보강했다.
유벤투스는 레프트백 알렉스 산드루를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올렸고, 아사모아를 레프트백 자리에 뒀다. 라이트백 바르찰리를 오른쪽 센터백으로 두고 리히슈타이너를 전진하는 라이트백으로 썼다.
이 변화를 통해 곧바로 두 골을 뽑아냈다. 동점골 과정에 리히슈타이너의 오버래핑, 역전골 과정에 산드루의 위치가 주효했다. 유벤투스의 폭이 넓어졌고, 측면 미드필더와 프풀백의 간격이 좁아지면서 토트넘의 풀백 뒤도 위협을 받았고, 그로 인해 손흥민의 활기도 떨어졌다.
■ 선수의 능력 + 감독의 능력, 제3의 변인: 체력X집중력X정신력=경험
상대도 전략적으로 좋은 준비를 했다면 차이는 경험과 운에서 갈린다. 운은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예측불가능한 공의 이동, 판정, 부상 등 다양하게 작용한다.
팽팽한 경기에서 선제골이 가져다 주는 심리 변화도 중요하다. 선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이다. 마음 가짐에 따라 집중력이 달라지고, 집중력이 흔들려 실수가 발생할 때 골이 나온다. 축구는 골이 많이 나오는 스포츠가 아니다.
집중력은 체력과 연관이 있는데, 정신력과 상관 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정신력은 부상을 불사하고 몸을 던지는 투혼이 아니라, 경기 중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 속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 정신력은 다양한 경험을 겪으며 쌓인다. 2-1 역전승으로 경기를 마친 뒤 키엘리니는 “우리는 믿고 있었다. 하루 전 있었던 레알마드리드와 PSG의 경기처럼, 우리가 가진 경험을 믿었다”고 했다.
키엘리니가 말한 경험은, 유벤투스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해본 팀이고, 근래 결승전에 올라본 팀이며, 유벤투스에 속한 선수들이 클럽 레벨은 물론 국가 대표 레벨에서도 큰 무대의 토너먼트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이점을 말한다.
키엘리니는 “토트넘은 케인, 알리, 손흥민 같은 환상적인 공격수를 보유했고, 이들은 매 경기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낸다. 우리와 경기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선제골을 허용한 뒤에도 믿음을 놓지 않았고 차분하게 경기에 임했다. 우리에게 찾아올 기회를 기다렸다. 기회가 왔을 때 해냈다”며 평정심을 끝까지 유지한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 한계 만난 토트넘, 힘들게 쌓은 경험 다음 시즌 지킬 수 있나?
경기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포체티노 감독은 “이제 전 유럽이 토트넘을 존중한다. 우리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준비가 됐다”고 자부했다. 알레그리 감독은 “1차전에서 2골을 넣은 토트넘이 유리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압박감이 더 클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안방에서 원정골을 두 골이나 내준 상황에도 알레그리 감독과 유벤투스는 여유가 있었다. ?은 팀 토트넘은 2차전에서도 선제골을 넣으며 기세를 올렸지만 리드한 채 맞이한 후반전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알레그리 감독이 전술 변화를 줬을 때, 포체티노 감독의 대응은 기민하지 못했다. 포체티노 감독은 철학과 이론이 뛰어난 감독이지만, 에스파뇰과 사우샘프턴, 토트넘을 거쳐온 과정에 큰 대회의 높은 단계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토트넘 부임 이후에도 끝내 타이틀 레이스에서 밀릴 때 운영의 묘를 발휘하지 못했다.
2-1로 경기가 뒤집힌 뒤 포체티노 감독은 미드필더 에릭 다이어를 빼고 라멜라를 후반 29분에 투입했다. 알레그리 감독은 이과인을 빼고 스투라로를 투입해 수비를 강화했다. 토트넘은 후반 41분에 알리를 빼고 페르난도 요렌테를 넣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유벤투스는 흔들리지 않고 2-1 리드로 경기를 마쳤다.
유벤투스의 관록과 경험이 드러난 경기였다. 다만, 토트넘도 이 경기를 통해 쌓인 경험이 잔여 시즌과 다음 시즌을 치르는 과정에 힘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경험을 쌓은 감독과 선수를 지킬 수 있느냐다.
빅클럽과 셀링클럽의 경험 차이는,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른 팀의 핵심 자원이 야망과 돈을 따라 팀을 떠나면서 좁혀지지 않는다. 케인과 알리, 에릭센, 그리고 포체티노 감독은 꾸준히 레알마드리드 등 빅클럽과 연결되고 있다. PSG도 포체티노 감독을 원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로치데일과 FA컵, 허더즈필드와 프리미어리그 경기에 이어 유벤투스와 챔피언스리그 경기까지 3경기 연속골을 넣은 손흥민은, 유벤투스전을 통해 자신이 ‘월드 클래스’라는 것을 확실히 입증했다. 이 경기를 포함한 올 시즌 손흥민의 폼을 본다면, 손흥민도 레알마드리드와 연결될 자질을 충분히 보였다. 토트넘의 지속가능성은, 포체티노 감독과 ‘공격 4중주’를 다음 시즌에도 지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글=한준 (스포티비뉴스 축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