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위대한 선수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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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 투신(鬪神)으로 불렸던 앤더슨 실바(45·브라질)는 지난 1일(한국시간) 종합격투기 UFC 미들급 경기에서 유라이어 홀(36·자메이카)에게 KO로 졌다. 상대의 거친 펀치를 부드럽게 흘려보냈던 예전의 실바가 아니었다. 홀의 공격에 얼굴이 피로 범벅된 그는 엎드린 채 펑펑 울었다. 홀도 실바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실바는 이 경기 전까지 "은퇴 여부는 나중에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홀에게 참패를 당한 다음 날 은퇴를 공식화했다. UFC 역사상 최장 기간(2457일) 챔피언이었고, 10회 방어전 성공이라는 역사를 가진 실바도 한 방울 남은 에너지까지 다 연소한 뒤에야 은퇴할 때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런 은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평생 싸워온 사람은 싸움판을 제 발로 떠나지 못한다. 세계 최고 무대인 UFC에서 퇴출당한 스타 중 상당수가 중년의 나이에도 군소단체에서 치고박는다. 파워와 스피드가 현저하게 떨어져도, 그들은 좀처럼 멈출 줄 모른다. 돈을 더 벌고 싶기 때문이다. 싸움 자체가 좋아서이기도 하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았던 무하마드 알리(1942~2016)는 "서른 살 넘어서 복싱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등 시대의 강타자와 여러 번 싸운 알리도 39세 나이에 밑바닥까지 떨어진 뒤에야 링을 떠났다. 그는 은퇴 후 3년이 지나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투기 종목이 아닌 구기 종목 선수들은 더 오래 뛸 수 있다. 기량이 감소하는 속도가 더디기 때문에 '클래스'가 있는 선수라면 더더욱 은퇴 시점을 잡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지난달 전격 은퇴를 발표한 K리그 이동국(41·전북 현대)과 KBO리그 김태균(38·한화)의 결심은 신선했다. 둘은 몇 년 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내려놨다. '강요된 은퇴'로 뜻이 변질한 '명퇴'가 아닌 진짜 명예로운 은퇴(名退)였다.

이동국은 소속팀의 우승을 한 경기 앞두고 깜짝 발표했다. "매 시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뛰었다"는 그는 "몸이 아픈 건 참아도 정신이 약해지는 건 참을 수 없더라"고 말했다.

지난겨울 FA(자유계약선수)가 된 김태균은 관례를 깨고 다년이 아닌 1년 계약을 선택했다. 올 시즌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자 팀 재건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우승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며 수차례 사과했다.

두 선수의 은퇴식은 슬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선수로서 충분한 업적을 쌓았고, 자의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일찍 은퇴한 만큼, 제2의 인생을 더 빨리 시작하는 그들을 축하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동국과 김태균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펑펑 울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30년 동안 달려온 싸움터를 떠나는 심정은 선수가 아닌 이상 헤아리기 어렵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시간을 이길 수 없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스타라면, 멋진 뒷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지막 팬서비스다. 한 박자 빠른 은퇴 덕분에 이동국·김태균은 초라하지 않았다. 박수받으며 떠나는 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

UFC의 라이트급 챔피언 하빕 누르마고메도프(32·러시아)도 지난달 깜짝 은퇴를 발표했다. UFC 254 메인 이벤트에서 저스틴 게이치(32·미국)를 2라운드만에 서브미션 승리를 거둔 뒤였다. 미대학체육협회(NCAA) 디비전1 올아메리칸을 지낸 엘리트 레슬러 게이치를 더 강력한 레슬링으로 압도한 누르마고메도프는 승리 후 옥타곤 바닥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그는 "오늘 경기가 마지막이다. 아버지가 없는 싸움에 큰 의미를 못 느끼겠다"며 글러브를 바닥에 두고 떠났다. 누르마고메도프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레슬링을 가르친 아버지를 지난 7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잃었다. 그는 "앞으로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누르마고메도프의 은퇴에 UFC 관계자와 팬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선수 생활의 최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틀 3차 방어를 성공한 누르마고메도프는 29전 전승을 달리고 있었다. '무패 챔피언'이라는 브랜드 덕분에 2~3년 전부터 수백만 달러의 파이트 머니를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근 누르마고메도프는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를 제치고 UFC 파운드 포 파운드(P4P·모든 선수의 체급이 같다고 가정해 매긴 랭킹) 1위에 올랐다. 그는 이미 코너 맥그리거, 저스틴 포이리에 등 강한 도전자들을 압도적으로 이긴 상황이다. 몸값은 최고점에 올랐지만, 마땅한 상대는 없었다. 더 많은 돈과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UFC는 쇼 비즈니스에 최적화됐다. 타이틀 방어전은 어쩌면 지루한 사업이다. 상위 체급 타이틀에 도전하거나, 복싱이나 프로레슬링을 하며 수익 모델을 만든 선수들이 많다. 그러나 누르마고메도프는 최정상에서 예고 없이 떠났다. "돈은 다른 방법으로 벌 수 있다"는 말과 함께였다.

하빕의 라이벌 격인 맥그리거는 '은퇴 선언'을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선수다. 은퇴 선언으로 화제를 만들고, 옥타곤으로 돌아와 더 큰 돈을 벌었다. 전설적인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44·미국)의 49전 전승, 50전 전승 기록도 은퇴·복귀를 반복해서 만들었다. 2017년 메이웨더의 50번째 복싱 상대는 종합격투기 선수 맥그리거였다. '서커스 매치'로 조롱받았던 이 경기에서 메이웨더가 3억 달러(3380억원), 맥그리거가 1억 달러(1120억원)를 번 것으로 알려졌다. 둘은 현재 은퇴 상태에서 수시로 복귀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심지어 둘이 재대결한다는 뉴스도 잊을 만하면 나온다.

누르마고메도프는 결이 달랐다. 게이치를 이기기 전까지 그는 은퇴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그의 아버지가 "아들은 정상에서 떠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가 떠난 뒤 아들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의 은퇴 선언을 누구도 가볍게 듣지 않는 이유다.


누르마고메도프는 세계적인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5·포르투갈)와 '절친'이다. 둘은 국경과 종목의 장벽을 뛰어넘어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누르마고메도프는 지난해 12월 영국 '더 선'과의 인터뷰에서 친구가 정상에서 떠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해온 일에서 떠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영원할 수 없다"며 "35세가 된 호날두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제때 떠나지 않으면 더 젊고, 더 굶주리고, 더 동기부여가 된 선수들이 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누르마고메도프는 친구를 위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스포츠를 떠나지 않으면, 스포츠가 널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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