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전태풍, 그의 인생 2막이 기대되는 이유
프로농구 서울 SK의 베테랑 가드 전태풍이 올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예고한 바 있다. 24일 2019-2020 현대모비스 프로농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중도에 종료를 결정하면서 전태풍의 은퇴시기가 예상보다 앞당겨졌다. 잔여경기가 모두 무산되면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은퇴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는 못하게 됐지만 SK가 DB와 공동 1위 자격을 인정받으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올 시즌 30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3.8득점 1.6리바운드 2.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아무래도 화려했던 전성기에 비하면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기록이지만 부상으로 자주 자리를 비웠던 에이스 김선형의 공백을 잘 메우며 SK가 공동 1위로 시즌을 마치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선수로서 경쟁력과 스타성이 있는 전태풍의 선수생활 연장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전태풍은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계획에 변함이 없음을 강조한 바 있어서 은퇴는 확실시되고 있다.
미국 출생으로 한국인 어머니와 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전태풍은 이승준-이동준 형제, 문태종-문태영 형제 등과 더불어 한국농구에 2010년대 귀화혼혈선수 열풍을 주도한 1세대다. 미국명은 토니 애킨스(Tony Akins)였으나 시민권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전태풍으로 개명했다.
2009년 전주 KCC를 통하여 한국프로농구에 진출한 전태풍은 당시 한국농구에서는 보기힘든 화려한 기술과 슈팅을 겸비한 공격형 포인트가드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10-11시즌에는 KCC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후 고양 오리온, 부산 kt 소닉붐을 거쳤고 2015년 다시 KCC로 복귀했으며 올시즌에는 SK에서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보냈다.
전태풍은 화려한 기량 못지않게 뛰어난 쇼맨십과 한국사랑에 대한 진정성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한국 진출 초기부터 서툴지만 공식 인터뷰에 항상 한국어로 임했으며 팀 내 선수들과도 한국어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발음은 어눌하지만 항상 거침없이 솔직하고 유쾌한 전태풍식 화법은 팬들 사이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큰 인기를 끌었다. 농구실력은 뛰어났지만 한국어를 잘 쓰지 않고 마인드도 외국인 선수에 가까운 태도로 아쉬움을 남겼던 문태종-문태영 등과는 다른 행보였다. 특히 올스타전에서 프레디 머큐리 분장을 하고 나타나거나, 동료 선수 성대모사를 면전에서 능청스럽게 해대는가 하면 개인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는 등 전태풍이 없는 올스타전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반면 귀여운 이미지와 달리 코트 안에서는 누구보다 승부욕이 넘치는 선수이기도 했다.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김태술, 파틸로, 조 잭슨 등과 치열한 신경전을 펼친 일화는 유명하고, 종종 트래쉬토크와 거친 파울도 마다하지 않는 선수였다. 올시즌 삼성전에서 천기범의 뒤통수를 고의적으로 가격한 사건 때문에 징계를 받는 등의 흑역사도 있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자제하는 모습도 보여줬기에 나쁜 이미지가 누적되지는 않았다.
한국 농구의 수해자이자 피해자
한국농구에서 대체로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던 전태풍이지만 마냥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태풍을 '한국농구 시스템의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태풍은 이른바 한국농구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플레이스타일을 상당히 희생해야 했다. 실제로 KBL 진출 초창기와 말년을 비롯하면 전태풍의 플레이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기에는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추구하는 미국식 농구를 했다면, 안정적인 경기조율과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한국식 농구에 맞춰가면서 특유의 창의적인 기술농구가 점점 사라졌다. 전태풍 스스로도 가장 아쉬워했던 대목이다. 전태풍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하는 한국 지도자들의 권위적인 태도나, 개인 기술보다 체력훈련을 강조하는 풍토 등에 대하여 여러 차례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전태풍은 귀화혼혈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차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팀을 떠돌아다니는 저니맨이 되어야 했다. 다른 귀화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 용기있게 KBL의 규정에 대하여 '차별적 요소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전태풍이 유일했다.
이 과정에서 전태풍은 자신이 추구하는 농구와 맞지 않는 팀이나 지도자를 만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선수생활 말년에는 친정팀이던 KCC에서 재계약에 실패하며 SK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구단이 약속을 저버렸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전태풍이지만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전태풍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 예비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빅맨인 이승준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이후로는 대표팀에 부름을 받지 못했다. 국제무대에서 장신선수가 부족한 대표팀의 특성상 전태풍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만일 전태풍이 전성기에 한국 대표팀에서 뛰었다면 어느 정도의 활약을 보여줬을지는 지금도 농구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다.
돌이켜보면 전태풍은 한국농구에 진출하며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SK처럼 선수들의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는 지도자와 구단, 성적지상주의보다 팬서비스와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를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전태풍의 커리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빛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 농구 스타일이든 스타성이든 전태풍같은 유형의 선수가 한국농구에 다시 나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 아쉬움이 남는다.
전태풍은 은퇴 후에도 한국에서 농구인생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은퇴후 유튜버로 전향한 '영혼의 콤비' 하승진과 함께 방송활동 계획부터 유소년 농구교실 지도자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뛰어난 입담과 쇼맨십 못지않게 한국과 한국농구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행보다. 선수로서 코트는 떠나더라도 영원한 '농구인'일 수밖에 없는 전태풍의 인생 2막이 여전히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