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인터뷰] '느림의 미학'은 왜 대학 투수코치로 갔을까

[BO]스포츠 0 4205 0
 

프로 2군 감독을 하다가 대학리그 무대를 옮겼다. 명문대 감독 자리도 아니다. 갓 창단한 신생팀의 투수코치. 성준(58) 전 삼성 2군 감독은 지난 시즌이 끝난 뒤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성준 전 감독의 현재 직함은 수성대학교 투수코치다. 지난해 12월 삼성을 떠나 수성대로 자리를 옮겼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수성대 야구부는 올해 창단한 신생팀이다. 선수는 1학년 24명(투수 12명·야수 12명)이 전부. 대부분 고교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고 야구 명문대 진학에 실패한 이력이 있다. 아직 환경도 열악하다. 다른 대학교 야구부처럼 전용구장을 갖춘 상태도 아니다. 당장 전국대회에서 성적을 내는 게 쉽지 않다.

경북고 선배 서석진 감독과 의기투합했다. 경북고 감독 시절(1986~1997년) 이승엽의 스승으로 유명한 서 감독은 TBC 라디오 해설위원을 맡다 수성대 초대 감독에 올랐다. 삼성과 재계약이 불발된 성 전 감독에 러브콜을 보냈고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성준 전 감독은 현역 시절 '느림의 미학'으로 불렸다. 빠르지 않은 공에 긴 인터벌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1986년 삼성에서 프로 데뷔해 1998년까지 라이온스에서만 뛰었고 1999년 롯데에서 1년을 더 뛰고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100승에 딱 3승이 부족할 정도로 롱런했다. 그러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코칭스태프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2001년 SK 2군 재활코치를 시작으로 코칭스태프 경력을 쌓았다. SK, 한화, 삼성을 거치면서 1군 투수코치, 1군 수석코치, 2군 감독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2군 감독은 보통 1군 감독에 오르기 전 단계이다. 삼성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어도 어떻게든 프로에서 버티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미련 없이 대학야구로 눈을 돌렸다. 현역 시절 별명처럼 느리지만 화려하지 않게 그만의 방법으로 야구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33년간 탔던 KTX에서 이제 내린 것 같다. 후련했다. 선수로 14년, 지도자로 19년… 총 33년이다. 주위에서 복도 많다고 얘길 한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학으로 갈 때 고민은 없었나.
"사실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 물 흐르는 대로 가겠다고 생각했다. 프로가 아니면 아마에 있을 텐데 아마에 와서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학교 감독 자리도 제안을 받았었다. 주위에선 다 대학교 감독을 가라고 하더라. 격도 그렇고 페이(연봉)도 다르니까. 아군이 없었다. (웃음) 결국 잘 선택한 거 같다. 감투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서석진 감독과 인연은.
"서 선배는 경북고에서 10년 정도 감독을 했다. 나보다 5년 선배다. 경험이 참 많으시다. 탐라대 야구부도 창단했고 해설위원으로도 6~7년 정도 활동하셨다."

-프로에선 톱 수준의 유망주를 지도하다 이제 180도 다른 선수들과 마주하게 됐는데.
"능력 차이가 난다. 원석 자체가 다를 수도 있다. 10년 정도 야구를 계속하다 프로의 선택을 못 받고 서울 또는 지방 4년제 학교 진학이 어려워진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기회를 못 받았거나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자기 플레이를 해보지 못한 친구이 꽤 있다. 2년(수성대는 2년제 전문대) 정도 맡아서 비전을 제시하는 게 하나의 미션인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엔 등급이 떨어져 보일 수 있지만, 선수들의 자세가 돼 있다. 가치가 있는 선수들은 밀어주고 그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싶다. 사회로 나가는 젊은 친구들에겐 교두보나 디딤돌 같은 2년이라고 생각한다."

-눈높이를 맞추는 게 어렵지 않나.
"프로 2군도 사실 선택받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대학 선수를 보면 더 부족할 수 있다. 그 부분을 잘 컨트롤해야 한다. 장점을 어떻게 드러내고 기본기를 다지느냐가 중요하다. 3M(메카닉·멘탈·매니지먼트)이 장착돼야 한 번 점프할 기회가 온다. 가장 강조하는 건 자세다."

-프로 코칭스태프에 대한 미련은.
"홀가분하다. 꼭 돌아가야 한다는 건 없다. 불러주는 곳이 있어도 (꼭 간다는 것보다) 생각해볼 문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도 당장 쫓을 게 아니다."

-현역 시절 '느림의 미학'으로 불렸는데 코치 생활도 비슷한 느낌이다.
"(선수 때는) KTX가 아니더라도 완행열차였다. 멈춤 없이 갔다."
 

 


-열차의 목적지는 어디였나.
"97승에서 도전이 끝났지만 사실 100승을 하고 싶었다. 주연급 선수에게 100승은 당연하지 않나. 나 같은 평범한 조연급 선수도 100승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100승을 눈앞에 두고 유니폼을 벗었는데.
"젊었을 때는 정규시즌 막판 포스트시즌이 확정되면 경기에 나가지 않았다. 1승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말년엔 다르더라. 능력이 있을 때는 운이 따르는데 1승의 간절함이 커지니 운도 없었다. 말년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내 능력이 여기까지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다만 프로에 들어갈 때 삼성에서 등번호 14번을 달았다. '14년 동안 선수 생활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숫자에 심어놨는데 공교롭게도 딱 14년을 했다."

-선수 말년에 롯데 이적한 것도 그 이유 아닌가.
"통산 100승에 4승이 남았을 때 구단에서는 '이제 다 됐다'며 그 정도만 하는 걸 얘기했다. 갈림길에 섰던 게 구단에서 은퇴를 얘기하면 보통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다. 구단에서 관두라고 하니까 최소한 '공부할 수 있는 팀을 연결해주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삼성의 레전드는 아니어도 13년간 몸담지 않았나. 아직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당시 김명성 롯데 감독을 찾아갔다.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그럼 온나'라고 하시더라. 롯데에 간 뒤 3일 만에 1승을 올렸다. 하지만 전반기가 끝난 뒤 팔꿈치가 아팠다."

-선수 시절 수술을 받은 적은 없지 않나.
"맞다. 꾸준하게 했는데 늘 팔꿈치가 조금씩 안 좋았다. 1990년에는 어깨 문제로 미국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그 시즌 팀에 외국인 코칭스태프로 마티 코치가 있었다. 김상엽한테 커브를 가르쳐준 분인데 외국인 코치는 그때 처음이었던 거 같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11년 잠시 삼성 코치진에 합류한 뒤 2012년 SK로 이적했고 2015년 다시 돌아왔는데.
"너무 행복했다. 삼성을 나가는 과정도 있었지만 그렇게 오고 싶더라. 내 고향 아닌가. 선수 생활을 하면서 13년을 몸담았던 팀이다. 삼성을 나간 뒤에도 생각은 있었는데 다시 밟기가 힘들더라. 2014년을 끝으로 SK에서 이만수호가 아쉽게 닻을 내렸다. 어느 날 류중일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특유의 말투로 '뭐합니까'라고 하더라. 거취에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그렇게 삼성으로 돌아가게 됐다. 늘 마무리는 고향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류 감독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가진 희망 사항을 류 감독이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코치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
"너무 많다. SK 최정은 처음 입단했을 때 야수로 먼저 스타트했다. 고등학교 때는 투수도 했는데 야수로 바꿨고 외야수도 했다. 처음 3루수를 할 때는 실책도 많았다. 김강민은 3루수였는데 외야수로 전환한 기억이 있다. 흔히 스승과 제자라는 얘길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선수가 되는 과정은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개인적으로 스승과 제자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저 어시스트일 뿐이다. 거쳐 간 구단마다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

-처음 코치 생활을 SK에서 했는데.
"1999년 롯데를 끝으로 은퇴한 뒤 사실 외국에 가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연결이 잘 안 되더라. 팀에서 해주면 됐을 텐데 개별적으로 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2000년 초반 서석진 감독이 팀을 창단한 탐라대학교에 가서 잠깐 있다가 그해 가을 미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교육리그를 다녀왔다. 교육리그 중 SK에서 연락이 왔다. 고민에 빠졌는데 (이)만수 형님이 일단 가서 부딪히고 부족한 게 있으면 다시 공부해도 된다고 하더라. 당시 SK에선 강병철 감독의 연락을 받았다."

-강병철 감독과 인연이 있었나.
"특별한 인연은 없다. 굳이 인연을 찾아보자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우리 집에 한 번 찾아오셨던 기억이 있다. 선린상고가 모두 위라고 했는데 경북고가 전국대회에서 3번을 깼다. 1981년 최대 핫이슈였다. (웃음) 그해 대통령기 예선 탈락한 뒤 청룡기와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전국체전을 모두 우승했다. 당시 동아대 감독을 맡고 계셨는데 날 스카우트하려고 하셨다. 그런데 이미 봄부터 한양대와 가계약이 된 상태였다."
 

 


-공이 빠른 투수는 아니었다.
"늦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았다. 프로 초창기에는 시속 140㎞ 가까이 쐈다. 당시엔 느린 공은 아니었다. 레퍼토리는 단순했다. 직구와 슬라이더로 다 했다. 직구를 던지고 타이밍이 맞으면 슬라이더를 던졌다. 볼 끝이 있으니까 타자가 때려도 먹히는 타구가 꽤 많이 나왔다. 서른 정도가 되니까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 어려워 권영호 선배한테 SF 볼(Split-Finger Fastball)을 배웠다. 더 느린 공이 필요해서 커브를 장착했는데 그때부터 인터벌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웃음) 슬로우-슬로우-퀵이거나 퀵-슬로우-슬로우처럼 변화를 줬다. 인터벌도 하나의 무기였다."

-선수 때는 100승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젠 프로 1승을 목표로 하는 선수들을 육성한다.
"에너지를 주고 싶다.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기술을 향상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요즘 행복한가.
"KBO 리그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이 크지 않다. 기회가 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최근엔 대구 4개 중학교(경운중·대구중·경복중·경상중) 야구부에 재능기부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퓨처스(2군) 감독을 하면서 늘 생각했던 부분이다. 야구의 기본은 중학교에 다닐 때가 가장 중요하다. 그 기초를 다지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 만수 선배도 엄청난 재능기부를 하지만 나도 나름의 작은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웃음) KBO 리그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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