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지시 닷새째에도… 장·차관은 "언론 보고 알았다, 정보 없다"
[폭력에 중독된 스포츠] [下] 스포츠 윤리센터 내달 출범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습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6일 국회에 나와 '고(故)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선수 사건을 언제 알았느냐'는 의원 질문에 답한 말이다. 최윤희 문체부 2차관은 이날 팀 닥터 행세를 하며 최숙현에게 가혹 행위를 한 혐의를 받는 안모씨에 대해 "정보가 없다"고 했다.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특별조사단장을 맡은 지 닷새째였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최숙현이 숨졌던 지난달 26일 보고받았다. 박 장관은 나흘 뒤인 30일 언론의 첫 보도로 내용을 접했다. 가장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할 두 기관의 수장 사이에 정보 공유가 없었던 것이다.
최숙현 측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시청,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지검 경주지청 등 5개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서로 정보 공유나 협조가 없어 사건 처리가 더뎌졌다. 최숙현의 아버지는 2월 6일 경주시청을 찾아가 민원을 접수시켰지만, 경주시 체육회는 4월 경주경찰서가 자료를 요청하기 전까지 사건 자체를 몰랐다.
최숙현은 4월 8일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에 이메일로 신고했다. 그런데 조사관은 5월 18일 최숙현이 보낸 자료를 보고서야 선수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대한철인3종협회의 선수 관리 파일에 선수의 '의료 기록'은 없었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대면조사나 심리상담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사관은 경주경찰서 수사관에게 전화해 정보를 얻으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경찰 입장에선 수사 내용을 외부에 알려줄 수 없었다. 조사관은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6월에야 최숙현 담당 변호사를 통해 자료를 확보했다. 그는 지난달 23일에는 '팀 닥터' 안씨로부터 "술을 먹고 몇 차례 때렸는데 김규봉 경주시청 감독이 말렸다"는 진술서를 받았다가 최근 국회에 제출했다.
철인3종협회 역시 2월에 이 사건을 인지했지만, 김 감독으로부터 '문제없다'는 얘기만 듣고 추가 조사를 하지 않았다. 가해자 말만 듣고 '제 식구 감싸기'를 한 것이다. 김도균 경희대 체육대학원 교수는 "한번 문제가 제기되면 여러 기관이 이를 공유해 신속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최 선수는 여러 기관에 고통을 호소하고도 늑장 처리 탓에 도움을 받지 못했다"며 "시스템이 있어도 작동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작년 1월 쇼트트랙 국가 대표팀 조재범 코치의 심석희 선수 폭행 사건을 계기로 내놓은 체육계 비리 근절 대책의 핵심은 '스포츠윤리센터' 설립이다. 외부 독립 기구인 윤리센터는 기존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가 담당하던 스포츠 인권 관련 업무를 넘겨받아 8월에 문을 열 예정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 유관 기관끼리 돕지 않으면 윤리센터도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윤리센터는 강제 조사권이 없고, 센터장도 비상근이어서 한계가 있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박양우 장관은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와 대검찰청, 경찰청, 국가인권위원회와 회의를 한 다음 "윤리센터는 강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독립 기구가 될 것"이라며 "센터장은 상임이다. 스포츠 특별 사법경찰 제도 도입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윤리센터 설립 추진단은 현재 직원(25명) 공개 모집을 마치고 심사 중인데, 피해자 얘기를 듣고 2차 피해 예방을 위한 지원(법률·의료 지원 서비스 연계)과 정서 지원(심리 평가·치료 프로그램)을 할 상담사는 3명에 불과하다. 박 장관도 지난 6일 국회에서 "센터 예산과 인력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인권침해 정도에 따라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제도 도입도 필요하다. 주종미 호서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는 "인권침해가 접수되면 상담사가 심각성 등을 파악해 위험도별로 피해자를 분류한 다음 '고위험군' 피해자는 빠르게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위험군 피해자의 경우 한 달 안에 1차 조사 결과를 알려주는 등 기간 설정도 필요하다. 피해자가 기약 없이 기다리다 희망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