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암 회고 ③ “농구 감독과 기업 CEO 공통점? 경쟁에서 이길 때 정말 짜릿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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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랜드와 재계약 못하면서 막막. 한 가정의 가장인데 뭘 못하겠나 싶었다”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사장 시절 “영하 20도에서 직원들과 동고동락한 게 좋은 결과로 이어져”
-“농구계 복귀 생각보단 농구가 많이 보고 싶었지. 일에 빠져 농구 볼 시간 전혀 없었다”
-“농구와 경영의 공통점, 경쟁에서 이길 때 가장 짜릿하죠”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 그때 다시 발걸음을 내디뎌야”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퇴계로]
 
KBL(한국프로농구) 출범 이전인 1994년. 한국 농구 최고의 팀을 가리는 농구대잔치에서 정상에 오른 팀이 있다. 실업의 강호를 물리치고 대망의 우승컵을 안은 주인공은 연세대학교였다. 대학팀이 농구대잔치 정상에 오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연세대는 1997, 1998년에도 농구대잔치 정상에 올랐다. 농구계는 이때를 ‘한국 농구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당시 연세대 농구부를 이끈 이가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이다. 최 부회장은 1986년 연세대 지휘봉을 잡고 무려 17년간 팀을 이끌었다.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 당대 최고의 스타가 최 부회장의 지도로 탄생했다. 
 
2002년 정든 연세대를 떠나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전신), 동국대,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지휘봉을 잡은 최 부회장은 2009년 돌연 농구계를 떠났다. 
 
최 부회장은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연 매출 3천억 원 규모의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사장으로 시작해 부회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최 부회장은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소를 상대로 영업에 나선다. 공장 관리도 소홀한 일이 없다. 
 
한 번의 삶을 살면서 두 차례의 큰 성공을 맛본 인간 최희암이 누군지 궁금했다엠스플뉴스가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는 최 부회장을 만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최희암 회고 ① “특출나고 지도자 말까지 잘 따르면 최고선수, 이상민이 대표적이었지” 
최희암 회고 ② “황금기? 이상민·서장훈·문경은 등 스카우트가 시작이었지”
 
농구인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고려용접봉 최희암 부회장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감독을 끝으로 농구계를 떠난 최희암 부회장(사진 오른쪽)(사진=KBL)

 
2009년 전자랜드 지휘봉을 내려놓고서 농구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009년 10월 9일 고려용접봉(KISWEL)이란 회사에 입사했어요. 그로부터 한 달 뒤였죠. 그해 11월 9일 중국으로 떠났죠.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프로 우승'이란 꿈에 도전할 기회가 남아 있었는데요.
 
전자랜드와 재계약 하지 못하면서 솔직히 막막했어요. 한 집안의 가장인데 돈벌이를 못 하게 생겼으니까. 내색은 안 했지만 걱정이 많았죠. 그러던 에 고려용접봉 이기홍 총괄부회장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사장으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받았죠. 처음엔 당황스러웠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뭐라고 답했습니까.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죠. 가족은 물론 주변 지인을 만나 의견을 묻고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냈죠. 이 또한 기회이니 모든 걸 걸고 도전해보자. 
 
농구계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큰 선택이었습니다. 
 
결론에 도달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 한국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운 좋게 선진 농구를 접했고 지도자 생활까지 했다. 연세대에선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 올렸다. 프로에선 정상에 서지 못했지만 두 차례나 지휘봉을 잡았다. 이 정도면 농구는 할 만큼 했고, 농구인으로서 누릴 것도 많이 누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고려용접봉 이기홍 총괄부회장이 농구인 최희암에게 기업 경영을 맡긴 이유,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직접 여쭤본 적은 없어요. 이 총괄부회장님 2006년부터 전자랜드 사장으로 일하실 때 선수들을 지도하는 제 모습을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농구와 기업 경영이 전혀 다른 일이긴 하지만,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라면 잘 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저 또한 운동선수뿐 아니라 직장생활 경험이 있어서 자신 있었고요.
 
이 총괄부회장의 선택, 결국 성공했습니다. 농구와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첫 8개월은 정말 힘들었어요. 회사 매출이 33%나 줄어서 의도치 않은 구조조정까지 시행했죠. 3조 3교대 시스템을 2조 2교대 시스템으로 바꿨습니다. 저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중국에서 타던 차를 팔고, 한화로 800원 하는 회사 밥을 직원들과 함께 먹었어요. 지출을 아끼는 데 앞장 선거죠. 그러니까 직원들도 불만 제기를 못 했습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회사 지출을 아끼는 것 못지않게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집중했어요.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소통하려고 했죠. 중국은 온돌 문화가 없어요. 우리 공장이 중국 대련에 있는데 거기가 엄청 추워요. 겨울 평균 기온이 -15도입니다. 공장은 -20도가 넘었죠.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공장에 난방시설 들여놓을 돈은 없고, 직원들은 따뜻하게 해주고 싶고. 고민이 되더라고. 결국 남녀 탈의실에 난방 시설을 설치했어요. 추울 때 잠깐이라도 쉴 수 있게 만든 거죠. 숙소엔 보일러를 설치해 24시간 뜨거운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전까진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직원들 고생이 엄청났던 거죠. 그렇게 직원들과 소통하니까 작업 능률이 올라가기 시작하더군요. 
 
흑자로 돌아선 겁니까. 
 
8개월 뒤부터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중국에서 4년 6개월이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웃음). 지금도 직원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1986년부터 17년 동안 연세대학교 지휘봉을 잡은 최희암 부회장(사진 맨 왼쪽)(사진=엠스플뉴스)
 
 
힘들 때 ‘농구계로 복귀할까’란 생각은 안 했습니까. 
 
평생 농구인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보단 농구를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종일 일해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직원들과 함께 뛰어야 한다는 마인드로 일에만 몰두했죠. 결정적으로 '최희암'이란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못 해요(웃음). 그걸 잘 아니까 일만 생각했지.  
 
제2의 삶에서도 성공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듯 합니다.
 
전 ‘성공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아요. 나보다 뛰어난 분이 훨씬 많아요. 누군가가 내 자리를 대신했다면, 회사는 지금보다 큰 발전을 이뤘을지 몰라요. 그래서 더 죽을힘을 다했습니다. 고려용접봉 이기홍 총괄부회장께서 아무것도 아닌 제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셨습니다. 100%를 쏟아부어도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소홀히 하겠어요.  
 
“고려용접봉을 ‘월드 베스트5’로 이끄는 게 내 인생 마지막 꿈” 
 

최희암 전 감독은 농구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은 채 제2의 인생에서 다시 최고가 됐다.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그 꿈이 실현될 때 그는 농구계가 아닌 재계에서 추앙하는 경영인으로 우뚝 설 것이다(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첫 임무였던 중국법인 사장직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4년 6개월간의 중국 생활을 마친 뒤엔 어떤 일을 맡았습니까. 
 
중국에서 맡은 업무와 다르지 않았어요. 적응하는 데 문제가 없었죠. 한국 복귀 후 서울에서 2개월 근무하다가 경남 창원으로 내려갔어요. 
 
일에 대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지금 하는 일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 언제입니까. 
 
농구 때와 똑같습니다. 경쟁에서 이길 때가 가장 짜릿하죠(웃음). 입찰에 성공하거나 원하는 물량을 확보하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뜻대로 되지 않는 날도 많아요. 그런 날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웃음).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 복귀 후 고려용접봉 사장을 거쳐 현재는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농구계에서 은퇴를 앞둔 후배들에게 성공 비결을 알려주시지요.
 
누구든지 답은 알아요.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매 순간 온 힘을 다해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 선수 때나 지금이나 모자란 사람이에요. 그래서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일합니다.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해요. 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오늘과 다른 내일이 찾아옵니다. 
 
매일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부회장께선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용접회사를 만드는 게 마지막 꿈입니다. 헛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경제는 이미 세계 강국 수준입니다. 충분히 가능해요. 2016년부턴 우리 회사가 ‘월드클래스 300’에 속하면서 발전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월드클래스 300’이 뭡니까. 
 
정부가 글로벌 강소기업 300개를 육성하기 위해 2011년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요. 선정된 기업은 연구개발비의 절반 이내에서 연간 최대 15억 원을 지원받죠. 직전 5년간 연평균 매출 증가율이 15% 이상이거나 최근 3년간 지출한 연구개발 투자비가 연 매출의 2% 이상이란 기준을 만족해야 합니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중도탈락할 수 있어요. 
 
고려용접봉은 연 매출 3천억 규모의 회사입니다. 한국 공장 외에도 중국과 미국, 말레이시아 등지에 공장을 두고 12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런 회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2016년 ‘월드클래스 300’에 도전하자고 했을 때 반대가 심했어요. 이거 안 해도 우리 직원들은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거든.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지금보다 나아지려는 의지가 부족해요. 현실에 안주하는 거죠. 세계 최고의 용접회사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데 왜 발걸음을 멈춰요. 외부 자극이 필요해서 신청한 겁니다. 사실 심사 볼 때 심사위원들도 '왜 이걸 신청하느냐'는 식으로 물어보더라고. 
 
그래 뭐라고 답했습니까. 
 
‘튼튼하고 돈도 많은 회사가 신청한 거 맞다. 그런데 지금보다 더 큰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데 나아가질 못한다. 국가에서 지원을 받으면 보는 눈도 많아진다.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는 거다. 그래서 지원했다’고 답했죠. 실제로 ‘월드클래스 300’에 속한 이후 우리 제품 구성과 품질이 향상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기자님.
 
네, 부회장님.
 
그거 꼭 기억하셔야 해.
 
어떤?
 
농구에서 적중율 100% 슛은 존재할 수 없어요. 그래서 노마크 슛찬스에서 슛을 쐈어도 우리는 가만히 서 있지 않고, 공이 림이나 백보드를 맞고 나올 걸 대비해 리바운드를 준비하는 겁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이 최상이라도 내일은 최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하지 않으면 오늘 같은 내일은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한 얘길 했나요(웃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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