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후 프로 입단 박상오 “13시즌 뛴 게 기적이죠” [엠스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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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20시즌 끝으로 은퇴한 박상오, 27살에 프로 입문해 ‘13시즌’ 뛰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80cm, 학창 시절엔 적수가 없었죠” 
-“운동부 체벌과 집합 문화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군대가 박상오를 사람 만들었죠”
-“박상오는 프로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엠스플뉴스=고양]
 
농구계는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한 선수들을 ‘황금세대’로 부른다. 김태술(1순위·원주 DB 프로미), 이동준(2순위·은퇴), 양희종(3순위·안양 KGC 인삼공사), 정영삼(4순위·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등 농구계 눈을 사로잡은 선수가 즐비했던 까닭이다.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내국인 센터 함지훈은 당시 1라운드 10순위로 프로에 입문했다. 
 
그해 동기들보다 3살 많은 27살에 프로에 입문한 선수가 있다. 1라운드 5순위로 부산 KTF(부산 KT 소닉붐의 전신)의 지명을 받은 박상오(40)다. 박상오는 2010-2011시즌 정규리그 MVP(최우수선수상)를 받는 등 KBL 정상급 포워드로 오랜 시간 활약했다.  
 
박상오는 2007-2008시즌을 포함해 13시즌을 뛰었다. 1997년 출범한 KBL에서 12번째로 600경기 출전 기록을 남겼다. 통산 기록은 603경기 출전 평균 8.3득점, 3.3리바운드, 1.3어시스트. 
 
박상오가 2019-2020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박상오는 프로농구 선수로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엠스플뉴스가 박상오의 얘기를 들어봤다.  
 
학창 시절 떠올린 박상오 “당시엔 적수가 없었죠”
 
 
 
KBL 10개 구단은 6월부터 2020-2021시즌 준비에 한창입니다. 몸이 근질근질하진 않습니까. 
 
어색합니다(웃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농구공을 잡았습니다. 평생을 농구와 함께한 것이나 다름없죠. 아침에 눈을 뜨면 훈련장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몸이 근질근질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로 복귀하는 겁니까. 
 
프로농구 선수로 더 뛰는 건 어렵죠(웃음).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오후엔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중하죠. 은퇴 후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졌더니 살이 확 붙더라고요. 관리해야죠. 
 
지난 시즌 43경기 가운데 36경기에 출전했습니다. 더 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평생 농구만 했습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잘 준비해서 매 경기 5분씩이라도 뛰어볼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때 후배들이 보였습니다. 지금 내 자리가 후배들에게 간절할 수 있겠다 싶었죠. 39살입니다. 많이 했어요. 후배들이 이 시간을 잘 활용해 쑥쑥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은퇴하고 집으로 들어선 순간 어땠습니까. 
 
은퇴를 상상했을 땐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고 지난 시간이 빠르게 스쳐 지나갈 줄 알았어요. 현실에선 아무렇지 않던데요(웃음).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지만 설레는 감정이 더 컸습니다.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거예요. 기대가 있죠.   
 
도전이요?
 
유니폼은 벗었지만 농구계를 떠날 생각은 없어요. 학생선수를 가르치는 등 지도자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웃음). 
 
평생을 농구와 함께할 계획이군요.
 
지금도 농구가 좋아요. 평생 함께해야죠(웃음). 
 
농구는 박상오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구와 첫 인연은 어떻게 맺은 겁니까. 
 
초교 시절 슬램덩크란 농구 만화가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슬램덩크 모르는 친구가 없었어요. 방과 후엔 모래 코트에 모여 농구를 했죠. 결정적으로 키가 컸어요. 
 
키요?
 
6학년 때 키가 180cm였습니다. 프로농구 선수의 길을 걸어야 할 학생이었죠. 그리고 슬램덩크를 보고 ‘농구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유가 있어요. 
 
어떤 이유입니까. 
 
먼저 초교 6학년 때 생각이란 걸 강조할게요. 농구를 잘하면 슬램덩크 등장인물인 채소연 같은 멋진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웃음). 
 
아무나 농구부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기회가 있었습니다. 4살 위 친형 학교에 놀러 갔다가 광신정산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에 계시던 장덕영 교장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께서 절 보더니 큰 소리로 “너 이리 와봐”라고 하는 겁니다. “저요?”라고 하면서 뛰어갔죠. “너 몇 학년이야”라고 물으셔서 “6학년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께선 “너 나랑 키 좀 재보자”고 하셨죠.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선생께선 키가 183cm예요. 6학년인 제 키와 비슷했던 거죠. 선생께서 “너 내일부터 체육관 나올래? 광신중학교에서 운동해보자”고 했습니다. 채소연 같은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수락했어요(웃음).  
 
초등생이 중학교에서 운동한 겁니까. 
 
6학년 2학기 때부터 중학생 형들과 운동한 거죠.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겁니다(웃음). 
 
 
 
지옥이요?
 
운동이 힘든 것보다 운동부 특유의 문화에 적응하는 게 매우 어려웠어요. 제가 운동할 시기엔 체벌이 심했습니다. 집합 문화도 있었죠.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운동 시간에 농구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글쎄요. 
 
감독, 코치, 선배들 눈치 봐야 하거든. 머릿속에 ‘오늘은 몇 대 맞을까’란 생각이 사라지질 않는 겁니다. 이 문화가 너무 싫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체벌과 집합을 없앴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죠.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는 학생선수면 농구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학생선수들은 왜 맞은 겁니까.
 
운동부 생활하면서 “매보다 좋은 건 없다”는 말을 매일 들었습니다. 말 나온 김에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많이 맞아서 좋은 선수로 성장한 이가 많다”고 말한 지도자와 선배가 있었습니다. 글쎄요. 매를 맞지 않았다면 더 많은 학생선수가 훌륭한 프로농구 선수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중간에 농구를 그만둔 친구가 아주 많거든요.  
 
농구부에서의 운동은 어땠습니까. 
 
운동을 처음 시작한 한 달은 힘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죠. 적응을 마치고선 잘 나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요. 신체조건이 아주 좋았고 무언가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던 것 같습니다(웃음).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아주 재밌었습니다. 골밑에서 페이크 동작으로 상대를 속인 뒤 득점할 때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스텝 한두 번으로 수비를 따돌릴 때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렇게 거칠 것 없는 성장을 이어갔죠. 고교 시절까진 적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 제게 큰 시련이 찾아듭니다. 
 
“군대가 박상오를 사람 만들었죠” 
 
 
 
2000년 중앙대학교에 입학합니다. 
 
고교 시절까진 프로에 입문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중앙대에서도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뛸 것을 예상했죠. 그런데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느꼈습니다. 팀에 대학 최고 선수인 송영진(은퇴), 김주성(은퇴) 선배가 버텼어요. 뛸 자리가 없었습니다.
 
송영진, 김주성은 KBL 레전드이기도 합니다. 
 
그 두 명이 한 팀에서 뛰었습니다. 대학 무대에선 적수가 없었죠. 출전하는 대회마다 정상에 섰어요. 송영진, 김주성이 골밑에 버티니 외곽까지 살아났죠. 두 선배 모두 농구를 아주 잘했습니다.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면서 ‘저 선수에겐 안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어요. 힘들었습니다. 
 
아. 
 
그런 와중에 안 좋은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를 중앙대로 스카우트한 김태환 감독께서 창원 LG 세이커스 지휘봉을 잡은 거예요. 입학 4개월 만이었습니다. 감독이 바뀌고 식스맨 경쟁에서도 밀려났어요. 농구 하면서 첫 시련이었습니다. 낙오되는 것 같았죠. 그 시기를 버텼어야 하는데...
 
그 시기를 버텼어야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운동을 그만뒀습니다. 농구를 계속한다고 해서 장래가 보장될 것 같지 않았어요. 농구부를 나오자마자 입대를 선택합니다. 
 
현역병으로요? 
 
한국 남자라면 군 복무는 피할 수 없잖아요. 농구부를 나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나쁜 길로 빠질 것 같았습니다. 재검을 받은 뒤 바로 입대했죠. 첫 신체검사 땐 키가 196.6cm가 나와서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어요. 재검 때 키를 살짝 낮춰서 현역병으로 근무하는 데 성공했죠. 
 
일부러 현역을 간 겁니까. 
 
어머니께서 “무조건 현역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어요(웃음). 어머니 말씀을 따랐죠. 저는 이 시기 방황하지 않고 군 복무를 선택한 게 신의 한 수라고 봐요. 
 
신의 한 수요?
 
군대에서 농구를 했던 건 아니에요. 농구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죠. 부대 내 모든 작업을 책임졌습니다. 이등병 때부터 삽질, 곡괭이 등을 아주 잘 썼어요(웃음). 시멘트 작업도 제가 담당했습니다. 상병 땐 새 막사 짓는 데 투입돼서 6개월을 보냈어요. 군대의 핵심 업무인 작업을 책임지다 보니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죠. 
 
직업 군인을 제안받은 거군요. 
 
상병 때였어요. 중대장께서 저를 부르는 겁니다. “(박)상오야, 군대가 체질인 것 같다. 장교 시험 한 번 보라”고 했죠.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농구를 그만둔 상태였어요. 전역 후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몰랐죠. 어머니께서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군대가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어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어머니께선 하루도 마음 편히 주무신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들을 끔찍이 생각하세요(웃음). 어머니 말씀을 따랐죠. 
 
평범하게 군 생활을 마친 거군요.    
 
군대에서 배운 게 아주 많아요. 농구부 생활을 시작한 후엔 주변이 운동하는 친구뿐이었습니다. 다른 길로 나가는 친구를 만나는 게 어려웠죠. 군대는 아니었어요.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게 생활하느냐에 따라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죠.
 
 
 
농구공은 어떻게 다시 잡은 겁니까. 
 
사실 농구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중앙대 농구부를 내 발로 나왔습니다. 장덕영 교장 선생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어줬어요. 중앙대 강정수 감독께 테스트를 요청한 겁니다. 전역 후 중앙대 농구부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죠. 강 감독께서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말을 했습니까.      
 
감독께선 “운동하기 싫다고 매번 도망치던 것 안다”면서 “딱 일주일이다. 나가라고 하면 군말 없이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했죠. 
 
전역하자마자 아무런 준비 없이 테스트를 받은 겁니까. 
 
병장 때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겠다는 얘길 들었죠. 팀에서 하던 것처럼 농구를 하진 못했지만 기초 체력은 확실히 다졌어요. 줄넘기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죠. 휴가 땐 모교 후배들과 운동했습니다.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어요. 
 
어떤?
 
당시 광신중학교에 (김)건우(현 서울 SK 나이츠)가 있었어요. 일대일을 했는데 졌습니다. 농구 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거죠(웃음). 
 
그런 상태에서 테스트를 받아 통과한 겁니까. 
 
몸이 농구를 기억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전의 감각이 돌아왔어요. 당시 중앙대엔 함지훈, 윤호영, 한정원 등 쟁쟁한 선수가 있었죠. 그 선수들에게 쉽게 안 밀렸습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죠. 감독께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농구부에 정식 등록을 했어요. 프로농구 선수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겁니다.       
 
어떤 감정이었습니까.  
 
두 번 다시 밀려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체력 운동할 때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어요. 당장 포기하고 싶었죠. 버텼습니다. 힘겹게 잡은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경기는 언제부터 뛰었습니까.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운동을 꾸준히 한 선수들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뛸 자리가 없어서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었어요. 함지훈, 윤호영 등 후배가 경기하는 걸 찍은 거죠. 그래도 다시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꾸준히 훈련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왔죠. 팀 골밑을 책임진 선수가 하나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겁니다. 
 
주축 선수의 부상이 기회로 다가온 거군요. 
 
(함)지훈이를 시작으로 (한)정원이, (윤)호영이가 다 다친 거예요. 감독께서 절 불러서 딱 한 마디 했습니다. “뛸 수 있겠냐”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을힘을 다하겠다. 자신 있다”고 했어요. 연세대와 경기였습니다. 주득점원 역할을 했죠. 그날 이후 꾸준한 출전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다시 올라서기 시작한 거죠.  
 
“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내 이름이 불린 순간, 평생 못 잊죠”
 
 
 
2007년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5순위로 프로에 입문합니다.  
 
농구계는 당시 드래프트에 참여한 선수들을 ‘황금세대’로 표현했습니다. 김태술, 이동준(은퇴), 양희종, 정영삼 등 좋은 선수가 즐비했죠. (함)지훈이가 10순위로 뽑혔어요. (송)창무는 2라운드 7순위로 창원 LG 세이커스 지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1라운드 앞순위에 뽑힐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어요. 
 
이유가 있습니까. 
 
공백기를 무시할 수 없었어요. 학창 시절과 달리 농구계 눈을 사로잡는 선수도 아니었죠. 김태술, 양희종, 정영삼 등은 학창 시절부터 쭉 유명했어요.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2라운드에서 뽑히면 다행이란 마음으로 드래프트 현장으로 향했죠. 엄청나게 떨었습니다.
 
1라운드 5순위로 박상오의 이름이 불린 순간을 기억합니까.
 
평생 못 잊죠. 정확히 기억합니다. 부산 KTF(부산 KT 소닉붐의 전신) 차례였어요. 추일승 전 감독께서 단상 위로 올라왔죠. 감독께서 “KTF는 중앙대학교 박상오를 지명하겠습니다”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드래프트에 참여한 중앙대 선수 가운데 박 씨는 저 하나였어요. 성을 듣는 순간 꿈인 줄 알았죠.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해서 감독께 보답해야 한다고 다짐했어요. 어머니도 생각났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와 상의 없이 중앙대 농구부를 나왔었습니다. 어머니께선 “농구가 그렇게 싫으면 하지 말라”고 짧게 한 마디 하셨죠. 그리고 많이 우셨습니다.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프로농구 선수로 살면서 힘들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꾹 참고 버틸 수밖에 없었죠.    
 
그 덕분일까요. KBL에서 박상오는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선수였습니다. 첫 시즌부터 정규리그 54경기 가운데 38경기를 뛰었어요. 평균 출전 시간은 17분 37초로 적지 않았습니다. 
 
데뷔 시즌 초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와 경기에서 발목을 다쳤어요. 두 달을 쉬었습니다. 부상을 털고 복귀한 후엔 컨디션 관리에 애를 먹었죠. 팀은 외국인 선수 선발에 실패하면서 8위에 머물렀습니다. 아쉬움이 많은 시즌이었죠. 2년 차 시즌엔 개인 성적은 올랐지만 팀이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프로 데뷔 시즌부터 힘든 시기를 거친 박상오가 2010-2011시즌 정규리그 MVP에 올랐습니다. 
 
팀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시즌 전까진 정규리그 최다승이 40승이었어요. 우리가 41승을 올리면서 1위를 기록했죠. 시즌 개막 전부터 자신감이 있었어요. 
 
자신감이 있었다?
 
비시즌 운동량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렇게 운동했는데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억울할 것 같았죠(웃음). 몸 상태가 좋았습니다. 매 경기 몸이 가벼웠어요. 외국인 선수 제스퍼 존슨과 호흡도 좋았습니다. 3(스몰 포워드)·4(파워 포워드)번을 오가면서 재밌게 농구 했던 것 같아요. 이 시즌엔 운도 따랐어요. 
 
운이요?    
 
팀에 부상 선수가 많았습니다. 송영진 선배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두 달간 이탈했어요. (조)성민이는 국가대표 차출로 경기를 못 뛴 날이 많았죠. 제가 오랜 시간을 뛸 수밖에 없었어요. 부상 없이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한 덕분에 성적이 따랐습니다. 감사한 시즌이에요. 프로농구 선수로 살면서 인터뷰를 가장 많이 했습니다.
 
인터뷰를 가장 많이 했다?
 
경기 후 방송 인터뷰가 일상이었습니다(웃음). 경기가 없는 날엔 훈련 후 언론사 인터뷰를 진행했죠. 
 
MVP를 받을 건 예상했습니까. 
 
5라운드까진 예상 못 했어요. (김)주성이 형, (서)장훈이 형, (문)태종이 형 등 개인 기량에서 우수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MVP 받을 방법은 정규리그 우승뿐이었죠(웃음). 팀이 좋은 성적을 내서 받은 소중한 상입니다. 
 
2011-2012시즌에도 좋은 경기력을 보였습니다. 평균 두 자릿수 득점(11.2)을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 활약을 이어갔죠. 그런데 이 시즌을 마치고 서울 SK 나이츠로 둥지를 옮겼습니다.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해예요. 시장에 나갔지만 선택을 받지 못했죠.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SK 유니폼을 입은 겁니다. 트레이드가 제 의지는 아니었어요. 구단끼리 얘기해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죠(웃음). SK 문경은 감독께 지금껏 접하지 못한 새로운 농구를 배웠습니다. 결과도 좋았고요. 
 
 
 
이적 첫해인 2012-2013시즌 SK에서 두 번째 정규리그 우승을 맛봅니다.     
 
직전 시즌 SK는 KBL 10개 구단 가운데 9위를 기록했어요. 반전을 일군 시즌이었죠(웃음). 농구가 재밌었습니다. 장신 포워드 중심으로 코트에 나서 마음껏 플레이했어요.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선수가 3점슛을 쐈습니다. 수비 조직력도 좋았죠. KBL에 센터 없이 가드 한 명, 포워드 네 명이 하는 농구를 도입한 시즌이에요.   
 
당시 SK에서 슈팅 가드로 뛰기도 했습니다. 
 
문 감독께선 틀에 얽매이지 않았어요. 당시만 해도 패스에 장점이 뚜렷한 선수가 포인트 가드로 뛰었습니다. SK는 달랐어요. 슈팅 가드였던 (김)선형이와 파워 포워드 애런 헤인즈 모두 리딩 능력이 있었습니다. 정통 포인트 가드는 아니지만 그들에게 경기 운영을 맡겼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저 역시 슈팅 가드로 뛰면서 슛의 강점을 극대화했습니다. 
 
그렇게 SK 포워드 농구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2014-2015시즌을 마치고 친정팀 KT로 돌아갑니다. 
 
문 감독께서 “새 시즌엔 센터 중심 농구를 해야 할 것 같다”면서 “트레이드를 하게 됐다”고 전했죠. SK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특히나 농구가 재밌었습니다.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프로잖아요. 운명이라고 생각한 뒤 친정팀으로 돌아갔죠(웃음). KT에서 은퇴하겠다는 마음으로 3시즌을 뛰었습니다. 
 
은퇴하겠다는 마음으로요?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순 없잖아요. 팀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매 순간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2017-2018시즌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팀을 옮기죠. 저를 프로의 세계로 입문하게 해준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추일승 전 감독께서 불러주신 겁니다. 오리온에서 마지막 2년이 참 뜻깊어요.   
 
오리온에선 식스맨으로 경기에 나섰습니다. 오리온 시절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유가 있습니까. 
 
농구 인생을 쭉 돌아봤어요. 그리고 식스맨으로 짧은 시간을 뛰면서 느낀 게 많았습니다. 이전엔 당연한 줄 알았던 경기 출전이 아주 소중하다는 걸 확인했죠.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하며 경기를 뛴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은퇴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철이 든 것 같아요(웃음).     
 
“박상오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7살에 프로에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13시즌을 뛰었어요. 1997년 출범한 KBL에서 12번째로 600경기 이상 출전을 기록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프로에 데뷔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까. 
 
질투(웃음)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누군가를 넘어서야겠다는 생각을 매일 했어요. 성장의 동력으로 삼은 거죠. 
 
어떤 선수를 질투한 겁니까. 
 
그건 비밀입니다(웃음). 농구 잘하는 선수들 있잖아요. 그런 선수를 보면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질투만 한 게 아니에요. 그 선수를 넘어서기 위해 매일 땀 흘렸습니다. 그렇게 선수 생활을 이어온 게 오랫동안 프로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네. 
 
가정사이긴 한데 저는 아버지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죠.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집에 차가 없었어요. 차를 살 형편이 안 된 거죠. 프로에 입문할 때 반드시 성공해서 좋은 차를 사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돈 많이 벌어서 고생한 우리 어머니 호강시켜드려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본 적이 없죠. 대학 시절 잊히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순간입니까. 
 
집에 차가 없잖아요. 서울에서 중앙대 안성캠퍼스까지 숙소에서 쓸 이불을 짊어지고 갔습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죠. 도착해서 보니 나만 고생했더라고. 다른 선수들은 부모님 차 타고 편하게 학교로 온 거예요. 어머니께서도 이때를 기억합니다. 이불을 짊어지고 가는 아들의 뒷모습이 잊히질 않는다고 하세요. 너무 속상했다고 하시더라고. 전 프로에서 무조건 성공해야 했어요. 
 
어머니께서 은퇴 후에 해주신 말이 있습니까. 
 
어머니께서 “수고했다. 몇 년 푹 쉬라”고 하셨어요(웃음).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이셨죠. 
 
어떤?
 
“나 이제 농구 볼일 없겠네.”
 
어머니께서 아들의 선수 시절 경기를 빠짐없이 챙겨보셨군요.
 
농구 전문가세요(웃음). 요즘엔 옛날 경기 영상을 찾아보십니다. 은퇴한 저보다 어머니께서 더 서운해 하시는 것 같아요.
 
빨리 농구계로 복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회가 있으면 꽉 잡을 수 있게 준비 중입니다. 착실하게 준비해서 도전해야죠(웃음). 
 
프로농구 선수 생활을 마쳤습니다. 농구계에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화려한 개인기로 농구계 눈을 사로잡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묵묵히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선수였죠. 그리고 팬들에겐 늘 살가웠습니다. 팬이 없는 KBL은 존재할 수 없어요. 올스타전과 같은 행사가 있으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춤을 추면서 팬들에게 웃음을 전한 날이 있었죠. 팬을 위했던 선수로 기억했으면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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